3화.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이 된 극렬 친일파 박춘금 <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 뉴스펀딩 < 기사본문 - 경남도민일보
이때 눈치 빠른 박춘금이 상애회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박춘금은 상애회원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당국의 수습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일본으로서는 이처럼 반가운 일이 없었다. 상애회원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대지진 이후 불거진 민족 간 갈등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 모두 상애회의 활동에 적극 후원자로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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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아픈 순간을 자신의 출세길로 삼은 박춘금 우리는 알고 있을까?
상애회의 폭력활동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1924년 하의도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일본인 농장주 도쿠다의 요청으로 박춘금은 상태도와 하의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권총을 들이대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하면서 강제로 소작계약서에 날인하게 했다. 1928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재발하자 박춘금은 상애회를 이끌고 주민을 습격해 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외에도 1920년대 소작쟁의 곳곳에 개입해 일본인 농장주 편에서 농민을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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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이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이나 자치운동, 반일의식에 대해 비판하고, 일제 당국이 조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이렇게 공개적인 친일활동을 펴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그는 1932년 3월 제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조선인 최초로 일본 국회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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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고문을 맡았으며 1957년에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 1962년 아세아상사 사장을 엮임하고 1973년 3월 31일 도쿄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8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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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은 왜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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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 뉴스펀딩 < 기사목록 - 경남도민일보
#임종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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