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충절의 상징 ‘서비정’ 더 이상 방치 안 돼” < 부산·경남 < 지역 < 기사본문 - 데일리한국
특히 이 일대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6 순의비와 대한민국 듣록문화재 158호 학동마을 옛 담장, 경남문화재 자료 208호 고성 육영재, 경남문화재 자료 178호 명품고택(최팔간 고택), 경남민속문화재 22호 학림종택(전주 최씨) 등 현충시설과 문화재를 보유한 유서 깊은 마을이어서 답사객이 적지 않아 서비정의 전면 개보수가 절실하다.
서비정을 방문한 사람들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제74조의3 제 3항)과 현충시설의 지정, 관리 등에 관한 규정(제2조제1항, 제2항, 제11조 제1항 제2항) 등 관련 법령에도 명시했듯 경남도와 고성군, 중앙부처가 나서 그 행적에 누가 되지 않는 조처를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출처 : 데일리한국(https://daily.hankooki.com)
왜 경남문화재 현충시설인 서비정은 방치되고 개보수하지 않는 것일까?
최우순 독립운동가는 누구일까?
고성타임즈 모바일 사이트, 고성의 인물, 서비 최우순 선생
선생은 1910년 8월 일본의 강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있는 동쪽이 싫어 ‘지금부터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침식을 하고 서쪽에서 늙어 죽을 것이다’라는 글을 쓰고 서쪽 사립문을 뜻하는 서비로 자호했다.
한국민의 반발을 두려워한 일본은 국내의 명망이 높으며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인사들을 선발하여 소위 일본왕의 은사금으로 회유책을 꾀하였다.
선생은 전국 27인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고 1911년 3월 18일 일본헌병대 고성분견대장이 일본군 선무대와 함께 기마대원 15명을 이끌고 선생의 집으로 찾아와 소위 은사금을 내어 놓으며 의병을 일으키지 말라고 강요하였으나 선생은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하자 일본헌병은 밤이 되어도 돈을 받지 않으면 강제로 연행하겠다고 했다.
선생은 ‘날이 밝으면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거짓으로 말하고 그날 자정 의관을 단정히 차려입고 뜰에 앉아 북방재배를 하고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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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은사금을 주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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